나쁜 교육
감독 고수경 (2010 / 한국)
출연 허준석,윤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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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망똘망한 눈망울들, 정갈한 옷차림, 오래된 풍이지만 정돈된 교실.
시골의 한 전형적인, 어떻게보면 도시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초등학교 한 교실의 모습이다.

덜렁 4명인 아이들이 반원 모양으로 책걸상을 위치한 채 교탁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이상적 풍경을 완성시켜줄 희망 가득하고 열정적인 선생님이 서있다.

동요가 울려퍼지며 훑어진 이곳의 풍경 속에서,
그러나 그들의 수업과 대화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




영화 [다쁜 교육]을 관람하는 관객 만큼이나 소중한 꿈을 간직하고 싶은 선생님의 열망은 정열적인 목소리와 수업 진행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참가하고 있는 아이들의 생각과 관점은 영 딴 곳에 있다.

아이들의 일상을 밝혀줄 일기낭독시간.
장의사 집 아들은 시체 관람 코스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장사 중이고,
어떤 아이는 부모의 육체적 사랑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 또는 이웃, 외부 매체 등을 통해 자본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신봉하고,
상식과 패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발언에 '쿨함'이라는 정의를 덧씌운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보호하고 키우고 성장을 함께 하는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다소 거리낌 남은 단면을 보았을 때 당혹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

왜?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결론이 아니었던가?

사실 쿨한 것 같지만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알리고 싶지 않은 -어른들의- 사고관을 아이들이 받아들인다.
-어른들은- 대체로 그들의 연령에 이르다고 역설하고 복합적 이해 수준에 의문을 표시한다.
하지만 아시는지?
그 아이들은 향후 10년 사이로 그 구질구질한 사회의 사고관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칫 세상의 바보천치가 되기 십상이다.

그걸 얄팍한 하나의 환상으로 덮으려 하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허울로 덮고 싶었던 선생님은 10초도 되지 않은 사이 벗겨진 콩꺼풀, 가볍기 그지 없었던 그놈의 '사랑' 중독에서 풀리고 결국 사회에 무릎 꿇고 만다.
그걸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흡수력은 단연 돋보였다.

얄팍하다는 건 그야말로 상당히 부끄러운거다.
그래도 정답이라면 별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그다지 정답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인간은 숨기고자 하는 욕망을 여전히 유지한다.
그렇다면 좀 더 쉬운 정답은 이미 알고 있는 셈이다.

세상은 돈보다 소중한 게 있고, 그게 사랑이라면 태풍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강한 마음을 키우라고...
적어도 돈을 숭배하는 정도의 세기는 되어주어야 사고관의 역전도 가능한 것 아닌가?

실로 궁금하기도 하다.
껄쩍지근한데 따르고, 완전한 인정은 싫어 망사스타킹마냥 다 비치는 도구로 가리려한다.
아닌 건 아는데 어떻게 아닌지는 잘 모른다.
벗어나려하는 것 같다가도 안주의 일시적 안정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불안정감이 오래 누적되면 피로도가 쌓이는 건 인지상정.
도대체 어떻게 이 피로도가 해소되어 나갈 것인지 궁금하다.

블랙 유머와 반전이 재치있는,
완전 재미있지만 뒤끝 길이 남을 단편영화~!


*사진출처 : 다음무비(http://movie.daum.net)

 
기본정보  장편 | 극영화 | 드라마 | 덴마크, 스웨덴 | 113분 | 2010년
감독       수잔 비에르
출연배우   미카엘 페르.., 트리네 뒤르.., 울리히 톰센, 마르쿠스 리..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일       극장 : 2011-06-23
공식사이트   http://blog.naver.com/ibetterworld

영화를 보면서 바로 눈치채지는 못했는 데,
곱씹어 생각해보니 대단한 미덕이 하나 숨어 있다.
굵직굵직한 주제의 이야기가 꽤 많은데 영화 자체는 다급하지 않고 꽤 느긋한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내내 마음 편한 걸음걸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병으로 죽은 엄마의 치료를 아빠가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장례식 이후 영국에서 덴마크의 한가한 지방으로 전학 온 크리스티안.
처음엔 이에 한 교정기로 인한 이지메인가 싶었는데 은근슬쩍 섞이는 '스웨덴으로 돌아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인종문제까지 안고 있는 엘리아스.

덴마크에 살면서 아프리카로 의료활동을 다니는 스웨덴 출신 아버지를 둔 아들답게 엘리아스의 미덕은 그저 참기 뿐이다.
하지만 다소 위험해보이는 힘 겨루기에서 순식간에 자신들 만의 학생 커뮤니티 내에서 위치를 확고히 한 크리스티안.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던 자신을 상대해주는 그를 보면서 엘리아스는 또래와의 친목에 대해 처음 접하는 어린이마냥 들뜬다.

해소할 길 없는 분노에 대해 물리적 보복을 선택하는 크리스티안의 행보에 대해 무의식적 경계심이 들지만,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었던 엘리아스이 크리스티안과 함께 하기로 한 결정은 어찌보면 지당하기 그지 없다.

그들의 이유야 있으나 나이에도 사회에도 걸맞지 않는 갈 길 잃은 과격함은 과연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 포스터


^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

사실 위에는 크리스티안과 엘리아스의 이야기를 가득 적었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머리 터지게 고민된 부분은 아프리카에 의료활동을 간 아버지 안톤의 상황이었다.
과연 정의란 어디까지의 기준인가?

그는 아프리카의 어느 난민 캠프에서 계속 의료활동을 하면서 돌림병만 상대해도 가슴 아플 마당에,
육체적 피로보다 더한 정신적 고통과 판단의 순간을 마지하게 된다.
바로 어제 꿰매었던 칼로 갈라진 배의 임산부,
바로 오늘 저 세상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작은 몸에 온통 칼로 패인 상처가 가득했던 아이.
그 모든 일을 행했던 반군지도자가 자신의 상처난 다리를 고쳐달라며 난민캠프에 쳐들어왔다.
끔찍한 살인마를 치료하는 안톤에게 모든 가족을 잃은 난민들은 불만의 말을 한움큼 내고, 함께 하는 의료진조차 누구도 소독한 칼 하나 건네주지 않지만 안톤 만이 그 치료를 묵묵히 이어간다.

그러나 방금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이의 주검 앞에서 자신이 낸 칼 사례를 뽐내듯 말하는 살인마에게 결국 안톤도 분노하고 만다. 그는 반군지도자를 캠프 밖으로 끌어냈고, 그에게 가족을 잃은 모든 난민들은 함께 그를 죽였다.

극악한 살인마에게조차 지키고자 했던 의사로써의 윤리, 자신의 아이 앞에서 뺨을 때리던 덴마크인의 폭력을 참아낸 의지,
수없는 살인에 일말의 가책도 없는 한 인간의 모습에 안톤은 순식간에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패닉에 빠졌지만 곧 아들의 대형사고로 일시적으로 소강되었다.

안톤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같은 상황이라도 누군가는 독약이라도 먹여 적극적으로 죽여버렸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끝까지 치료를 완료할 수도 있다.
과연 정의라는 건 어디까지일까? 그것은 누군가에게나 동일한 기준인가? 기준점은 있되 수용가능한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이러한 장면에서 이러한 고민을 반복하는 와중에 드는 생각은 역시 하나다.
그 살인마가 저 정도까지 심하지 않았더라면, 약간의 실수 정도 한 거라면 용서도 되었을 텐데, 왜 그 머리 속은 건널 수 없는 강까지 건너버린 걸까? 함께 하는 커뮤니티의 룰을 공유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대체로의 사람들은 안톤의 행동에 가타부타의 결정을 지어 설명해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정의란 게 애초에 고정되어 꽂혀있는 깃발이 될 수 있는 것이었나?
사는 곳도, 입는 옷도, 먹는 음식도 조금씩 다르다면 발현되는 정의 역시 조금씩 다른 것 아닌가?
적어도 커뮤니티라면 소속된 사람들은 어느 기준점을 상정하여 어느 수준까지 동의할 수 있는 정의를 마련해놓을 것인지가 사실상 핵심이 아닐까? 하지만 손쉽고 잔인하게도 벗어나버린 인간이 있다면 그에 대한 공동의 결정은 과연 무엇인가?

이 영화는 언뜻 드러난 학교 폭력, 인종 차별, 정의와 처벌의 기준, 일상 폭력 이외에도
안락사, 가족의 화해 등 진중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하지만 결국 알고보면 다 인간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일상인 듯 얼마든지 빼곡하게 넣어도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게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거대하고 수려한 장관 속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사이 스며들어 있는 인간의 더러운 면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지향할 세상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영화.


* 사진출처 : 인디플러그(http://www.indieplug.net )
  1. عبدلله7 2011.06.27 04:41

    ((( 사귀게 된 와 함께 이슬람 )))

    http://alislam-kr.blogspot.com/

    Allah, CREATED THE UNIVERSE FROM NOTHING

    http://allah-created-the-universe.blogspot.com/

    THE COLLAPSE OF THE THEORY OF EVOLUTION IN 20 QUESTIONS

    http://newaninvitationtothetruth.blogspot.com/

    ((( Acquainted With Islam )))

    http://aslam-ahmd.blogspot.com/

    http://acquaintedwithislam.maktoobblog.com/

    O Jesus, son of Mary! Is thy Lord able to send down for us a table spread with food from heaven?

    http://jesussonofmary1432.blogspot.com/

    http://www.islamhouse.com/

  2. 인어베러월드 2011.06.30 10:32

    안녕하세요 인어베러월드 공식 블로그입니다.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은데,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블로그로 퍼가도 될런지요? 감사합니다^^

 코코아 (Cocoa)
 단편, 극영화, 드라마, 멜로, 퀴어, 사회, 대한민국, 32분, DV, 2006년
  • 감독 김진석
  • 츌연 정슬기, 채원, 한유나, 정기성
  • 등급 15세 관람가 


무용과 교수라는 전문 커리어가 있는 엄마, 미정.
그녀 옆에 있는 그녀, 민재.

딸 재이는 아빠도, 엄마도, 옆집 아저씨도, 아줌마도 아닌, 그저 엄마의 애인일 뿐(?)인 그녀가 여전히 대면대면하다.
설상가상 유학 전에 엄마 집에 들어오게된 민재에 대해 엄마는 더욱 애정이 새록새록해지지만, 딸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져간다.
말본새부터 시작해서 가시가 묻어나는 딸에게 애인 민재는 조심스런 소통을 이어가지만 중간에 생기는 갑갑스러운 공기는 제거하기 어렵다.


그리고 떠나고나서야 알게되는 공허함.
엄마는 무용과 교수라는 신분을 상실한 채 새벽에 끓여먹는 라면으로 상쇄시키고 있다.
딸은 엄마에게서 묻어나는 감정과 대면대면하게 쌓아온 관계의 온기를 끌어올려 엄마에게 투여하는 것으로 그리하고 있다.





달콤함 뒤에 남은 씁쓸함, 그것은 정든 이가 가고 없는 빈 자리에 대한 정의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극단으로 몰리는 게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또다른 관계들의 발생과 예전 관계로 인해 엮여진 새로운 내용들때문일지도 모른다.


민재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엄마 옆에서 -여전히 툭툭 던지는 말투이지만- ‘좀 챙겨야겠다’는 제스쳐를 취하는 딸 재이는 없을 런지 모른다.
민재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일상의 일부를 공유하던 그녀의 자리가 얼마나 컸는 지 엄마 미정은 깨닫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민재가 들어오면서 3명이 일으키게 된 새로운 파장이다.


이 영화는 코코아, 라면 등과 같은 아이템의 성격을 다시 음미해볼 수 있을 만큼 3인의 감정선과 밀접한 연결을 보여준다.
코코아는 달짝지근하지만, 이별을 고하는 끝에는 쓴 맛이 살짝 배어나기 마련이다. 라면은 포만감을 주지만, 이별을 경험한 이의 공허함을 매꾸기에는 너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
이렇게 든든하기만 할 것 같은 코코아, 라면 같은 아이템들도 실상 중간중간 허탈해지는 때도 있다.
그러나 다소 허탈하고 때론 삐그덕해보이는 그저 그런 소소한 일상의 관계들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하나하나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영화.

 

  1. 김진석 2011.03.02 20:09

    가끔 순수 관객으로써, 인디플러그를 찾다 우연찮게 제 영화 리뷰를 접하게 되었네요.
    부족한 영화에 좋은 글로 공백을 채워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용기내어 몇 자 적어 봅니다.
    저 역시 jineeya 님의 글을 통해 제가 보지 못하고 볼 수 없었던 부분들까지 새롭게 접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감쌀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열정이 되살아 나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번 부족한 영화, 잘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그런 '작가'가 되겠습니다.
    꽃샘추위에 감기 조심하세요.

최근 온라인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작한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받으면 12월 한달 동안
윤성호 감독의 주옥같은 단편 3작품 <두근두근 배창호>, <두근두근 영춘권>, <우익청년 윤성호>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두근두근 배창호 (Pitpat Bae Changho)
단편, 극영화, 드라마, 대한민국, 9분, HDV, 2008년

  수 있는 자가 구하라(+단편3편) (Read my lips)
장편, 극영화, 드라마, 코미디, 옴니버스, 대한민국, 78분, 2010년

<두근두근 배창호>에서 (역시 배우로 출연한) 윤성호 감독은 영화를 찍는 감독이다.
남자배우는 다른 스케줄 때문에 '이렇게 편집하면 되지 않냐, 내 장면 먼저 다 찍자' 호들갑을 떨더니 홀연히 사라진다.
남은 여자배우는 연출 의도를 설명하는 감독에게 시니컬하게 몇마디 던진다. '감독님 얘기' 아니냐고..


연출의 고통에 빠진 감독에게 카페 주인인 배창호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영화는 잘 모르지만 솔직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보라'고.




2008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배창호 특별전의 특별영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짧은 영화는,
-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배창호라는 감독이 그동안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 지 간결하게 보여준다.
그가 평생에 걸쳐 만들고 선보인 영화에는 그가 생각한 사랑과 감성과 로맨스가 짙게 배어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영화는 잘 모른다'면서 핵심을 짚어주는 몇마디로 모두 드러내준다.

윤성호감독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말에 동화되어버렸다.
그는 남자배우가 떠난 사이 다시 여자배우와 대사를 정리하면서 가식이 사라진 그의 대화 속에서 감독 배창호로부터 받은 무언의 영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마치 배창호의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그러했을 것처럼...


이 작은 영화가 보여주는 놀라운 기승전결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래서 윤성호는 감독이고 영화를 만드나보다.
그러했던지라 배창호는 감독이고 영화를 만들어왔나보다.

* 사진출처 : 인디플러그(http://www.indieplug.net)

 

 퍼머넌트 노바라 (Pamamento Nobara)
장편, 해외영화, 드라마, 판타지, 멜로, 여성, 일본, 100분

이 영화는 재미있는데 잔잔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심지어 반전도 작살이다.
따라서 네타, 스포는 완전 조심이다.


사실 이렇게 쓰고는 있지만 나라면 리뷰 같은 거 안 읽고 그냥 보겠다.
물론 최대한 네타 따위 피해 쓸거고, 읽어봐도 '이게 뭐 재미있겠어?' 싶겠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울 지도...
그리고 1시간 50분이라니 취향 아닌 사람은 살짝 지겨울 지도...



어느 작은 시골마을의 단 하나뿐인 미용실, 퍼머넌트 노바라.
주인장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의 연령대 높은 여인들의 천국이다.
이 집의 딸인 나오코는 어느새 딸 하나를 키우는 엄마인 동시에 이혼녀로, 어머니의 가게를 돕고 있다.


침착하고 고요한 겉보기와 달리 생각외로 부지런한 참견쟁이인 나오코 덕분에 관객들은 마을의 다양한 인물들의 오늘을 엿볼 수 있다.


동네 친구인 마사코는 술집 마담이면서 순정녀로, 가게 아가씨와 바람난 남편을 못내 떠나보내지 못하고 꽤 과격하게(?) 지지고 볶고 산다. 그녀의 역동적인 삶은 며칠에 한번씩 전기톱으로 전신주를 잘라 온 마을을 정전으로 만들어버리는 아버지와도 연결되어 있다.
역시 친구인 토모는 얼핏 다리아처럼 보이지만 전혀 인생을 모르는 푼수와 다소 엽기 버전으로, 언제나 애인에게 맞고 떠나보냈지만 유일하게 때리지 않은 남자를 만나 결혼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불운의 흐름이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남편은 좀더 색다른 문제로 샛길로 빠지지만, 훌쩍이는 그녀를 보아도 왠지 거대한 상처가 휩쓸고 간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 밖에도 오랜만에 뽀글파마에서 벗어나고 솔로 상태에서도 벗어난 좀 뚱뚱 아줌마, 산 속에 홀로 사며 남자를 갈아치우는 대단한(?) 능력자 할머니 등,
나오코가 '루저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라고 칭하기엔 그럭저럭 잘 사는 것 같은 마을 주민들을 마주할 수 있다.


조용하고 별일 없어보이는 바닷가 시골마을이지만, 고등학교 때 스승이었던 선생과 교제 중인 나오코를 비롯하여 많은 여인들이 사랑하고 상처받고 가슴이 무너지고 다시 흥분한다.
마치 그것이야말로 삶이고 인생이고 존재 이유라는 듯.
(문득 복기하는 나오코의 어린 시절, 재혼하려는 어머니의 앞날을 방해한 자신의 만행이 비춰지는 건 드러나지 않아도 그녀의 사소한 죄책감의 발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방식들은 문득문득 일상 속의 생소, 엽기다. 그런데 그게 일상과 꽤 잘 붙어있어서 어느 정도나 부분이 엽기였는 지 골라내기도 쉽지 않다.
마사코가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차로 받아버린 남편에게 또 용돈을 내밀어도, 산 속 할머니가 이번에도 자기보다 먼저 간 애인할아버지를 홀로 묻어도 '뭐 그럴 수도 있지' 싶기도 하다.
물론 더욱 생소했던 건 그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녀들의 모습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나 역시 생소해지지 않는 건 그 안에 자연스레 들어가도록 인도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생각해보면 마을 어딘가 한 명씩 있을 '미친 년'들도 이렇게 집중적으로 보여주면 별일 아니고 별 사람 아니다.
그래도 마지막 반전을 꼭 확인하셔야 한다.
진짜 '미친 년'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마지막 그녀가 누구인지 말이다.


* 사진출처 : 인디플러그(http://indieplug.net)

에로틱 번뇌 보이 (erotic chaos-boy)
  • 2005 | 장편영화, 다큐멘터리, 드라마, 멜로, 명불허전, 대한민국, 75분
  • 감독, 출연 최진성
  •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빡센 사랑’과 ‘좆나 빡센 사랑’. 시작은 원래 그닥 빡세지 않았다. 본의..




erotic.
1. 성애의, 애욕을 다룬
2. (영화 등이) 성욕을 자극하는
3. 색정의, 호색의

love
1. 사랑, 애정, 호의
2. (보통 one’s ~) (안부를 전하는) 인사말
3. a 연애, 사랑 (of, for, to, toward(s))
b 성욕; 색정; 성교
c (가산) 정사, 정욕
4. a (또는 a ~) (사물에 대한) 애호, 좋아함, 취미
b (가산) 좋아하는 것[일]
5. (가산) 사랑하는 사람(darling)
6. (L~) 연애의 신, 큐피드(Cupid)
7. (신의) 사랑, 자비; (신에 대한) 경애, 공경
8. (가산) (구어) 유쾌한 사람, 예쁜[귀여운] 물건[사람];[pl.] 어린애들
9. [테니스] 영점, 무득점


* 출처 : 다음 사전(http://dic.daum.net)


이 영화는 잘 팔리고 섹시하게 어필하고 싶다면 '에로틱'에 강조의 강조를 더해야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에로틱'에 '번뇌'하는 30살 '보이'가 등장하는 '15세이상 관람가'의 컨텐츠다.


감독은 얼마 전 헤어진 것 같은 일본인 애인과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곧 있으면 타인과 결혼할 전 애인까지 만나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때론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때론 일상적으로 어려웠던 경험과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전 애인이 사준 귀걸이의 존재를 까먹은 자신의 기억과 사후 20년이 지난 할아버지의 나이를 읊는 할머니의 기억을 통해 사랑에 엮이게 되는 얄팍하고도 진중한 인간의 기억 놀이에 대해 짚어본다.


때론 친구들에게, 때론 부모에게 사랑에 대해 질문해보지만 시원한 한마디는 어지러운 여러 마디 후에도 정리될까 말까다.
심지어 용한 무당에게까지 들이대어진 '사랑의 정의에 대한 질문'은 엄청난 침묵을 이끌어낼 만큼 생뚱맞다.
그러나 처음 본 용한 무당조차 갖게 되는 질문에 대한 마음가짐은 형언할 수 없는 진지함이기도 하다.



매우 놀라운 점은 왠지 이 영화가 등장인물들의 진지함이 무색할 정도로 편하고 느긋하고 개구지다는 점이다.
왠지 사랑은, 진지하긴 하지만 엄청나게 일상적인 나머지 웃길 지도 모른다고 일러주는 듯 하다.
내지는 모두가 내뱉은 말을 감독의 "꼴리는 대로' 보여주면서 마치 감독 자신을 반복적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물론 감독은 영화 처음부터 소설 속의 인물의 행동으로 간주하라든가, 사랑했던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등의 방어선을 치지만, 동시에 '좆나 빡센 사랑에 대한 이야기'임도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사랑 묻기' 놀이에 지친 감독은 -실제로도 그랬을 것 같은데- 당분간 '사랑'은 꺼내지 않을 태세이지만,
그 와중에도 관객에게 하는 마지막 질문을 빠뜨리지 않는다.
여러분은 '빡센 사랑'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좆나 빡센 사랑'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영화제목에 의문을 표시하며 온라인사전을 찾아보고는 좀 놀랐다.


사랑이란 결국 사람에 대한 '애정(1.)', 때론 '성욕(3.b.)'이나 '정욕(3.c.)', 때론 그저 '좋아함(4.)'일 때도 있다.
더불어 '유쾌한 사람(8.)'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어떠한 감정이라거나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진심어린 '인사말(2.)'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합당한 마무리로써 가장 마음에 와닿는 건 폭발할 것 같은 감정도, 심연에 빠질 것 같은 감정도, 은근히 젖어드는 감정도, 때론 무심한 감정도 다 합치면 플러스 마이너스 '영점(9.)'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엉뚱한 것
'사랑은 택시와 같은거죠. 함께 걸어온 길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 영화<에로틱번뇌보이>에 등장하는 인터넷에 떠도는 김제동 어록 12번



* 사진출처 : 인디플러그(http://www.indieplug.net)

  1. 지성의 전당 2018.11.28 20:41 신고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번뇌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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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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