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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story

도시의 역할에 대한 경험적 고찰 - 연극 [썽난 마고자]

by jineeya 2010. 11. 3.


무명의 희곡작가가 노인들의 천국 탑골공원에서 연인을 만나 구상 중인 시나리오를 읊는다.
탑골공원의 노인들은 어느새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되어 친구도 만나고, 사랑도 만나고, 디자인서울에 복무 중인 방위도 만나고, 서울시의 행정인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긴장 백배, 때론 알콩달콩했던 하루는 그렇게 또다시 저물어간다.


연극 속 희곡작가의 연극에서 그들이 맞이한 오늘 하루 최대의 위기는 공원 사각정의 등나무를 베려던 시청 방위들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디자인서울'을 외치는 서울시의 수장 덕에 그들의 소중한 장소는 정리 일보 직전이다.


오늘 하루 최대 사건인 시청 방위들의 등나무 제거 음모(?).
그늘을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장기를 나누고 약주를 나누는 그곳을 밀어버리는 일은 최첨단 시설의 노인복지관 건물에 노인들을 몰아넣겠다는 중대한 음모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모든 노인들이 반대하는 일은 아닐거다. 몇몇은 만들어지는 노인복지관의 화려함에 눈과 기대를 빼앗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더 서러운 것은 그들의 작은 목소리가 너무 작다는 점이다.
솟구치는 분에 등나무 제거 요원 방위들을 빗자루로 쳐봐도 소용없다는 건 곧 깨닫게 된다.
뭣모르고 자르러 왔다가 사각정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노인들에게 둘러쌓인 방위들은 몸통이 시킨 일에 따랐을 뿐인 날개의 설움을 대변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노령화에 진입한 상태이다.
조만간 노인 인구는 사회의 허리를 구성할 지경이다.


하지만 노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정리, 자신에 대한 정리를 요구받는 시점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어느날 어떤 사고로 언제 어떻게 세상을 정리할 지 모르는 유한한 존재, 인간들이 만들어낸 설정이라는 점이다.
그 설정의 역사 얼마나 오래되었는 지 몰라도 최소한 지금의 사회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건 기본적인 차별과 멸시를 전제로 한다.
그들의 지혜와 경험보다는 그들의 체력과 외모가 평가와 편견을 지우고, 활동인구에서 자연스레 제외된다.
젊은이도 구조 조정당하는 판에 그들의 노동력은 하릴 없이 스러져간다.
산적해있는 사회문제는 그들의 문제를 핵심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그 작은 목소리를 탑골공원 전체에조차 퍼트리기 어렵다.
다만 다시한번 자신의 처지를 곱씹는 계기만을 전달해줄 뿐이다.


물론 '늙는다'는 점의 장점 역시 그들은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나름 활기차고, 한창 때에 비하면 단선적이라 오히려 감정선이 깔끔하다.
기쁠 땐 웃을 줄 알고 슬플 땐 울 줄 안다.

이러한 행동이 장점이라 짚이는 것이 현대사회의 꼴불견 중 하나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여도 다시 만나고 다시 놀고 다시 싸우고 다시 헤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을 받쳐줄 거라 믿을 수 밖에 없는 마을과 도시와 나라가 결코 그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닫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노인 만의 해당사항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활개를 치며 살지 못하는 모든 소수들의 공통 골치거리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본 영화 [종로의 기적]과 이 연극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점은 바로 이것인데, 과연 도시의 역할이란, 살기 좋다는 의미는 과연 뭘까?
행정가의 계획이 설령 완벽하게 계산된 구획화와 구조미를 갖는다하더라도 결국 그 안에서 오밀조밀 모여 사는 주체는 사람이다.
그들이 어느새 공동체를 이루고 그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날로 풍성히 가져간다면,
도시와 도시를 행정하는 자들의 몫은 그들이 유의미하게 창조한 공간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고 지켜나갈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아닐런지.


우리의 거대한 '디자인 서울'이 파산의 위기를 초래할 것 같은 두려움을 제외하고라도 밉상이 된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 사진 출처 : 플레이 DB(http://www.playdb.co.kr/playdb/playdbdetail.asp?sReqPlayno=1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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