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본 전시는 분명 최근 초현실주의 대표주자로 불린다는 블라디미르 쿠쉬의 전시회. 하지만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좀 다른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볼까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판타지한 세계를 추구한다면? 생선 뼈가 십자군 병정처럼 보이고 하늘의 구름이 거대한 입술처럼 보인다면?
보통 이런 경우엔 같은 어른들로부터 ’덜 자랐다’는 오명(?), ‘키덜트’라는 딱지를 면치 못할 것이다. 특히 ‘판타지’를 ‘팬시’의 어느 하위 개념쯤으로 여기는, 섬세함이 부족한 어른들의 혐오는 오명의 직접적인 피해를 더욱 증폭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팀버튼이나 미로처럼 목숨 걸고 본격적이고 진지하게 덤벼들면 그들의 존재를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이전에 마녀를, 신을, 괴물을, 심지어 살아있는 왕을 신으로 만들며 끊임없이 역할에 맞는 이상적인 모습을 찾아 그림, 조각, 건축 등으로 구현해온 인류의 역사를 보면 판타지에 오명을 붙이는 게 더욱 이상한 일 일수도 있다. 게다가 많은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신화들은 하나씩 하나씩 소설이 아닌 다큐로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뉴미디어아트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다보면 이미 SF가 판타지로 넘어가는 접점의 구현이 자연을 넘어선 가공의 막강한 조정 하에 이루어진다. 그들이 창조한 현존하지 않으나 향후 존재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대부분의 작업들은 간혹 관념으로 인지되어있으나 현대 물리가 근접해가고자 하는, 마치 비어있지 않은 허공의 세계를 밝혀내려는 듯한 욕망이 가득하다. 그런데 작업의 주체 자체가 현대인이다보니 작업의 대상들이 현대 사회의 각종 부조리를 상징하는 듯한 인상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창조한 욕망의 세계는 더욱 현실성을 부여받게 된다. 어떻든 현실성 유무와 관계없이 그를 통한 흥미 유발의 생산 매커니즘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구현되는 물리적 작업과 결과물의 양태는 또 다른 문제다.
한동안 디지털 프린트 작업이 폭증한 후 설치로 넘어가면서 다시 지루함이 상쇄된 느낌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각종 이미지 편집프로그램의 활용을 통한 디지털 프린트는 이제 질려버린 감이 없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쿠쉬의 작품은 확실히 –달리와 다르나 – 달리를 소환하는 향수도 약간, 대체로 프린트이긴 하나 적어도 사진 프린트가 아닌 그림작업 프린트이거나 실제 그림이 주는 묘한 포근함 역시 약간,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와 다소 엇비슷하게 물건으로 표현된 그 이미지들이 실제 살아있어줬으면 하는 바램 등이 조금씩 뒤섞여 있다.
그리하여 많이 본 듯하나 새롭고, 사소한 아이디어 같으나 그림 전체를 점유할 수 있는 이미지도 있고, 때론 신화에서 차용된 이야기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 신화 자체의 다큐화로 발생하는 - 현실성이 부여되는 균형감 있는 어긋남도 존재한다.
초현실은 이성의 간섭이나 논리의 지배를 벗어나는 무의식의 세계를 추구한다는데, 이미지 자체의 변용을 통한 그저 기이한 느낌의 묘사일수도 있고 낯선 배치나 이미지와 언어의 부조리 따른 사고의 요구일수도 있다. 바타이유의 논리처럼 ‘합리적 서구 철학에서 배제되어 초과분이 된 세계의 비합리적이고 성스러운 차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초현실을 상징하기엔 달리보다 마그리트가 더욱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이미지는 더욱 현실적이지만 엉뚱한 배치와 언어적 도단(?)만으로 마그리트는 우리의 의식을 교란시킨다. 이미지만으로의 교란을 의도하는 달리와 쿠쉬를 보자면 같은 의미로 달리가 쿠쉬보다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에 비의존적이고 마치 개인적 환각상태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파보면 뭔가 더 진하게 연결된 신화나 전설이나 종교의 이야기가 담뿍 들어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물론 본인의 생각은 알 수 없으나 굳이 특정 이념에 그림을 매어둘 필요는 전혀 없다. 새롭게 만들어도 좋고… 상대적으로 쿠쉬의 작품은 초현실이라기 보다 부유하는 현실, 무의식보다 좀 더 대중이 밟고 있는 의식의 세계에 가까운, 그 사이의 어떤 지점을 점유한다. 마치 차원의 표면에서만 붙어사는 인류처럼 현실이라는 표면에 살짝 뜬 안개처럼, 구름처럼, 때론 인간처럼 이미지가 부유한다. 그래서 익숙한 신화의 이야기는 다소 진부할 수도 있으나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므로 여전히 흥미로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발굴된 이미지는 때론 시시하고, 때론 사소하고, 그다지 획기적이지 않지만, 때론 새롭고, 더군다나 그립다. 마치 옛날옛적 그 언제인가 그러한 때가 있었던 것처럼.
잃어버린 선글라스
작별의 키스
붉은 지갑
해변의 일출
* 사진출처 - 예술의 전당( http://www.sac.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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