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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story

초자연의 21세기적 해석은 불합리? - 2014 현장제작작품설치 프로젝트 <초자연>

by jineeya 2014. 11. 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중인 <초자연>은 ‘과학기술과 예술을 융합하는 첨단 뉴미디어아트’ 작가들의 설치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 초자연은 자연스러움을 넘어서는 현상을 의미한다. 물론 시대에 따라 초자연은 다양한 의미변화를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고대인들은 달이 사라지거나, 평생 본 적 없는 홍수를 맞이했다거나, 지진으로 땅이 갈라진 걸 보고도 ‘자연스럽지 못함’을 이유로 초자연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대부분 자연이 신이었을 그 시대에도 재해는 특별한 신 또는 새로운 신으로 부각되었을 수도 있다. 어느덧 세상은 특출난 오감 보유자와 시대를 앞선 호기심 소유자, 오감을 넘는 육감 능력자 등을 통해 때론 과학의 이름으로, 때론 신비주의나 무속 등의 이름으로 초자연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일련의 과정이 현생인류가 멸망하는 그날이 와도 모두 파악할 수 없다는, 언제나 인간이 인지할 초자연은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을 신뢰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 물리학이 동양의 기(氣)의 정체를 인지한 이 때, 세상이 11차원일 것이라는 끈이론이 등장한 이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초자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가 간혹 판타지나 SF를 다루는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인종, 새로운 동물, 새로운 사물들은 진화하는 과학기술의 소용돌이에서 극적으로 우리의 시각을 자극는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이번 전시의 작가들 역시 뉴미디어 아티스트들로써 그들이 가장 강력하게 다룰 수 있는 도구이자 무기인 과학기술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 또는 그 단면을 노출시켜주는 제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리경 작가가 선보이는 공간은 안개로 둘러싸여 아스라히 보이는 레이저빛의 세계이다. 공간을 분할하는 붉은 빛은 선을 그리며 관람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 길을 벗어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붉은 선과 그로 인해 분리된 공간들의 암흑은 생각보다 강력하여 선뜻 통로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작가가 만든 길은 허상에 가깝다. 레이저선은 공간의 물리적 분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린 공간의 가벼운 안내선일 뿐이다. 어찌보면 허공이 우리에게 더욱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빛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면 레이저선은 어떤 구실을 하게 되었을까?


조이수 작가의 <바람의 정령>들은 다소 오싹한 리경 작가의 공간을 지나 둘이 나란히 걷기에도다소 비좁은 계단을 따라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움직이는 정령들의 모습은 숲에서 – 우리 눈에 한번도 띄지 않았으나 – 날아다니는 요정들의 기계 버전같기도 하다. 그들이 가슴에 품은 풍경은 뜻을 풀이하면 바람의 방울, 즉 바람의 소리를 의미한다. 갑작스런 공간의 하강과 벽의 배치물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가는 그 길은 우리가 상상하는 날쌘 바람의 모습일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씩 음미하고 만끽하며 지나갈 수 있는 잔잔하고 지긋한 바람의 통로이다.



   

리경 작가의 <더 많은 빛을> (2014)





조이수 작가의 <바람의 정령> (2014)





김윤철 작가의 <캐스케이드(쏟아지는 입자의 폭포)>는 리플렛의 소개글이 그리도 적절할 수 없다. ‘지배적인 자연 법칙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인공의 힘’. 그것이 바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의 세계이고 관람자 역시 그 엄청난 노력의 결과물을 한 방 가득 만끽할 수 있다. 실제 거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사각 비이커에서 출렁거리는 회색 액체의 질감은 엄청나게 두터운 느낌을 주어 질서에서 무질서로 나아가는 세상의 법칙을 시각화하고 있는 기분도 든다. 더불어 우주의 일부를 작은 연구실에 압축하여 실험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 아직도 자연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마저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노력에 대해 효과의 측면을 따지고 보자면 그 결과가 그다지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연 숭배를 넘어 자연 지배를 꿈꾸던 시대가 이미 아련한 과거로 물러나고 있는 지금, 그의 작업에서는 자연 지배의 야망과 가능성, 무수한 노력과 무서운 의지가 소급되어 자리를 채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백정기 작가의 <웨이브 클라우드>는 촛불을 통한 열에너지로 라디오 방송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거대한 시스템을 작가는 ‘비를 부르는 기우제’로 표현하고 있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으나 - 마치 김윤철 작가의 작업과 정반대의 측면에서 대비되어 자연의 숭배를 기반으로 한 기우제를 차용하여 현대인이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오감각화한 작품으로 보인다. 물론 촛불 발전작업을 통해 발생하는 자원의 소모를 단순한 음향이 아니라 라디오 방송 시스템으로 구축한 것을 보면 소통의 측면을 상당히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리플렛 상에서도 소통에 관한 내용은 일부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중세시대에 봤을 법한 촛불 발전기 시리즈나 라디오 시스템에서의 다양한 원목들과 그 배치는 경직된 소통의 현재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흡사 통로와도 같은 길쭉한 방의 구조는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김윤철 작가의 <캐스케이드> (2014)





백정기 작가의 <웨이브 클라우드> (2014)





사실 안내자 또는 제보자로써의 작가들의 역할은 ‘초자연’을 주제로 받았을 때부터 답이 없는 미로였을 지도 모른다. 다만 초자연이라는 단어의 이면에 상존하는 불합리가 작가들을 통해 첨단 매체를 활용하여 묘사될 때,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현대인으로써 사회의 각종 부조리를 상징하는 것 같은 인상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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