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 쯤 폐업한 법인의 5년 지난 문서들을 파쇄한다.
파쇄할 때마다 집의 공간이 약간 증가한다.
이 많은 서류들이 종이로 남아있는 걸 보면서 종이를 요구하는 행정 기구와는 사업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 고민한다.
그러나 동시에 곧 없앨 종이들 사이에 아직도 살아있는 기억과 추억은, 없앤다는 짧은 행위 중 잠시 고개를 드러낸다. 앞으로도 사소한 행위나 생각 만으로 꾸준히 드러날 예정이다.
[썸머 고스트]에는 유령과 유령을 찾는 산 자가 나타난다.
유령은 너무 사람같고 예상 외로 생과 사를 모두 경험했음에도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삶이 잔뜩 남아 무거워진 생각과 현실은 산 자들의 몫이다. 그리하여 유령은 본의 아니게 산 자들의 컨설턴트가 되기도 한다.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암울해진 현대 사회에 딱히 버려진 적 없는 듯 하여도 이미 버려지고 소외된 개인들의 개별 회생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모든 회생 방식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유령보다 더 먼 괴물같은 다른 산 자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하여 개개인의 기본 소양을 높이고 함께 이야기할 친구를 찾는다.
유령보다 더 먼 괴물이 언젠가의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지는 않는다. 현재 상황에서 괴물의 상태를 가늠할 수는 없다. 피해의 상흔을 회복하는 단계라 그건 좀 나중의 일이다. 그래서 단면 만으로 이 애니메이션을 받아들이면 위험할 수도 있다.
사람에게 완결은 없고, 노력과 행위는 계속 될 예정이며, 주변은 모두 공생자들이다.
오히려 이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가진 부분은 유령의 존재 형태다.
보통의 두려운 유령, 무섭게 다른 체계,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실상 산 자와 큰 구분이 없는 유령은 상이하나 동일한 분모를 공유한다.
굳이 따지면 1년마다 한번씩 정리하고 있는 추억의 문서와도 같다.
그들과 매일을 나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매년 또는 인생의 한 두번 정도라도 기억 속 추억으로 함께하는 존재들이다.
비록 물리적인 것들은 사라져도 때론 보내주고 때론 남길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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